하나님의 이끄심 속의 살아온 한 평생 ①

작성자 : 승리제단Date : 2014-02-24 11:51  |  Hit : 3,780  간 증 담 >> 박도흥(84세, 본부제단 장로)   하나님의 이끄심 속의 살아온 한 평생 ①   일제침략기였던 1924년 북한 평양에서 100리 떨어진 순천에서 태어났지만 얼마 안 있어 평양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여섯 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께서 갑자기 돌아가시게 되자 3살 아래 남동생과 저는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평양에는 고아원이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동생은 고아원으로 갈 수가 있었지만 저는 남의 집에서 심부름이나 해주면서 밥을 얻어먹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 평양 내에 있는 공장에 들어가게 되었고 월급을 조금씩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또 시간이 흘러 고향 순천에 있는 삼촌 댁에 가서 살게 되었는데 스물한 살이 되자 의무적으로 징병을 당하여 일본군에 입대하게 되었습니다.그 이전까지는 일본군대에서 한국인을 뽑지 않았지만 제가 군대에 들어갈 때는 한국인도 뽑았기 때문에 저도 일본군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으로 가게 되었고 그 당시 군인들에게는 최고의 인기였었던 남양군도로 가게 되었습니다.남양군도에서 군인들은 왕과 같은 대접을 받았는데 특히 거기는 열대지방이었기 때문에 군복도 하복으로 지급되었습니다. 한국에서 300명이 갔었는데 희한하게도 갑자기 저만 옷을 벗으라고 하더니 동복을 입으라고 하였습니다.
박도흥 장로님이 생명의 은인 야마네씨를 찾아달라는 내용의 신문기사 ….기사작성 久保田珪子
박장로님은 생명의 은인이라 도저히 잊을 수 없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그때가 8월이었는데 동복을 입으니 땀이 저절로 나와서  ‘나만 왜 동복을 입으라고 할까? 나도 하복을 입으면 좋을 텐데’라고 투덜거렸습니다. 저는 많은 일본 군인들과 함께 북쪽으로 가는 열차를 타게 되었고(물론 그 속에 한국인은 저밖에 없었습니다) 그 열차는 우리를 북해도 훈련소로 데려다주었습니다. 북해도 훈련소에 도착하니 거기는 벌써 서리가 내릴 정도로 남양군도와는 기온차가 많이 났습니다.  얼마 안 있어 훈련 중에 남양군도로 갔었던 사람들이 모조리 다 몰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섬으로 간 사람들 전원이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저는 ‘하나님이 나를 동복을 입히게 하여 살리셨구나’라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기며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이 생겼습니다.그때가 1944년이었기 때문에 미군의 폭격기들이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나마 북해도에는 남쪽보다는 상황이 조금 더 나았지만 훈련을 받고 있을 때에도 마음이 조마조마하였습니다.제가 속해있던 부대(曉아까쯔끼 6174부대)가 위치를 옮기고 며칠 지나면 원래 있던 곳이 폭격을 받고 모조리 몰살을 당하는 체험을 한두 번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살려주시는구나’라고 절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 저를 살려주셨던 그 하나님이 승리제단에 올 수 있도록 지금까지 인도해 주셨던 것입니다.저는 어렸을 때 일본어 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기 때문에 부대에서 보통 어려움을 겪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의사소통이 안 되니 정말로 이국땅에서 겪는 그 고통과 설움은 말로 형언하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제게 말을 걸어오는 일본인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야마네아끼오’라고 불렸는데 히로시마에서 왔으며 저와 동갑내기 청년이었습니다.그는 제가 하도 고생하고 말도 안 통하는 것을 보고는 불쌍히 여겨 자기 친동생처럼 끔찍하게 챙겨주면서 말과 모든 것을 가르쳐주었습니다. 다른 동료들이 저에게 뭐라고 말하면 그는 “이 사람아, 말도 못하는 한국인이 불쌍하지도 않은가!” 이런 말로 저를 보호해주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일본인이라면 나쁜 사람이라고 여겼는데 야마네아끼오를 보면서 모든 일본인이 그렇지가 않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잘 때도 그는 저와 함께 한 이불을 덮었으며 이불 속에서 밤새도록 일본어를 가르쳐주었습니다.훈련할 때도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것을 일일이 챙겨주었는데 그가 없었다면 저는 아마도 전쟁이 끝나기 전에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야마네와 저는 국경을 초월한 우정을 쌓아나갔습니다.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제가 속해 있던 부대는 전쟁포로가 되어 시베리아로 가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만 3년 반의 세월을 지내게 되었는데 역시 거기서도 야마네와 저는 서로 도우면서 지냈습니다. 또한 거기서 공산주의 교육을 받게 되어 저는 공산주의자가 되었습니다.1949년 1월에 석방이 되어 저는 북한으로 가게 되었고 야마네는 일본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후 국경을 초월하면서까지 우정을 쌓았던 그 야마네는 지금까지도 소식을 알 길이 없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전혀 연락이 두절된 상태에 있습니다. 저는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일본인들과 교포들을 만나면 그의 소식을 물었지만 아직까지 생사조차 알 수가 없습니다.막상 그를 만나면 해줄 것은 없지만 생명의 은인이기에 지금까지도 애타게 찾고 있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이 글을 읽는 분 중에 야마네아끼오라는 분을 알고 계시다면 지체하지 말고 저에게 소식만이라도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히로시마에 살고 있었다는 것밖에는 아는 사실이 없습니다)그렇게 야마네와 헤어지고 나서 저는 북한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이 나고 전 세계는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과 자유 민주주의 국가인 미국으로 크게 나뉘는 양상을 띠었는데 제가 있었던 시베리아 수용소에서는 공산주의 교육을 받을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완전한 공산주의자들만 석방을 시켰는데 일본의 공산주의를 책임질 포로들과 한국을 책임질 북한 공산당 포로들을 선발하여 석방을 시켰던 것입니다. 저는 당연히 북한 공산당 포로 속에 합류하여 북한으로 올 수가 있었습니다. 물론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완전한 공산주의가 이 땅에 실현되면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을 때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끄심 속의 살아온 한 평생 ②   1949년 1월,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석방될 때 북한공산당 포로 속에 합류하여 북한으로 올 수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 석방될 때에 남조선을 해방시키는 전쟁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고 또 그러한 임무를 부여받고 북한으로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드디어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에 벽보가 붙었습니다. 어떤 벽보냐 하면 큰 한국지도에 삼팔선이 그어져 있고 국방군(국군)이 그 삼팔선 위쪽으로 쳐 올라온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속으로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물론 사전에 조작된 내용이라는 것을 저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전쟁이 일어났는데 언제 그러한 포스터를 만들고 또 산골짜기에 붙인다는 게 말이 되지가 않았습니다. 몇 시간 후에는 새로운 벽보가 붙었는데 용감한 인민군들이 침투해 오는 국방군을 물리치고 남으로 진군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때 제 나이가 27살로서 군 입대하기에는 훨씬 지난 나이였지만 제가 판단하기에 그냥 남아있는 것이 오히려 더 위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결국 군 입대를 결정하였습니다. 아마도 전쟁이 길어졌기 때문에 군 입대를 지원하지 않았어도 결국 나중에 군인부족으로 징병되어 나갔을 것이지만 어쨌든 일찍 지원을 하게 되어 인민군들로부터 용감하고 위대하다는 박수를 받게 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평양에서 지원하게 된 인민군들 틈에 끼어 기차를 타고 수색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기차로는 갈 수가 없으니 걸어서 가야한다는 말을 듣고는 다 기차에서 내려 걷기 시작하였는데 지금의 광화문 앞 아스팔트 위에서 며칠을 보냈습니다.  며칠 후에 한강을 건너게 되었는데 한강다리가 끊어져 있어서 한강다리 밑으로 드럼통을 연결하여 그 위로 건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영등포를 지나 어떤 학교에서 또 며칠을 보내고 거기서부터 낙동강까지 계속해서 걸어갔습니다. 물론 낮에는 미군폭격기들 때문에 산에 숨어 있다가 밤에만 이동을 하였습니다.  드디어 낙동강에 도착하였는데 거기서 군사훈련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그 당시 저와 함께 걸어갔었던 인민군들 대부분이 군대를 가지 않았거나 군사훈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총을 제대로 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저야 물론 총을 잘 쏠 수가 있었기 때문에 저를 반장으로 세웠답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는 총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낙동강을 건너기만 하면 널려있는 게 총과 실탄이어서 모두 우리가 주워 가질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낙동강을 건너가기 직전에 참대밭 속에서 무기의 종류와 사용법에 대해 몇 시간 동안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게 군사훈련의 전부였습니다.  밤이 되어 낙동강을 건너갔는데 앞에서 말했던 그 말대로 정말 우리들 앞 사방 천지에는 무기들로 널려있었습니다. M1, 칼빈, 북한총 등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총들이 깔려있었고 실탄들도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그래서 닥치는 대로 주워서 자기 것으로 만들었는데 조금 가다가 보면 자기 것보다 더 좋은 무기가 나타나는데 그러면 먼저 가지고 있던 것을 버리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며칠을 가다가 보니 무기가 없는 사람이 한 명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산발적인 전투가 몇 번 있었지만 그대로 전진을 하게 되었고 조금 있으니 꽤 높은 고지가 우리들 앞에 나타났습니다. 숲이 상당히 우거진 곳이었는데 새벽에 습격을 하였습니다. 달랑 박격포 두 대로 공격하였는데 거기에 미군들이 아직 자고 있을 때였습니다. 박격포 소리에 혼비백산하여 미군들이 대항 한번 하지 않고 도망가기 바빴습니다.  그렇게 그 고지를 점령하고 얼마 안 되어 우리들도 공격을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대포가 우리들을 향해 넘어오고 비행기로부터 폭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제 주위로 많은 인민군들이 죽어갈 정도로 엄청난 폭격이 비 오듯 하였는데 그 때 저는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살려달라고 기도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 뜻대로 죽이시든지 살리시든지 당신 뜻대로 하시라고 기도를 하였습니다. 죽는 것이 두렵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인민군들이 20일 정도를 견뎌냈는데 주위의 그 많던 나무와 풀들이 모두 불에 타 없어지고 빨간 흙만 남게 되어 더 이상 숨을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또 개미떼처럼 많았던 그 많던 인민군들이 불과 수백 명 정도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캄캄한 새벽에 후퇴명령이 떨어졌는데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에 의해서 우리들이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후퇴명령에 의해 다시 낙동강을 건너가야 했습니다. 그 날 비가 부슬부슬 오고 있었는데 희한하게도 제대로 걸어지지가 않았습니다. 자꾸만 넘어지게 되면서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당시 남들에 비해 체력적으로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건강하다고 자부하였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현상이 일어나니 도대체 이해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걸을 수가 없게 되고 부대를 잃어버리게 되었지만 그래도 낙동강 직전에 있는 산까지 겨우 도착하였습니다. 그때가 9월이었지만 찬비가 내리고 낙동강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이 불어 닥쳤습니다. 따라가야 한다는 마음은 있었지만 몸은 말을 안 듣고 거기다 배는 고파서 더 이상 따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주위를 살펴보니 포탄에 의한 큰 웅덩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위에 소나무가지를 많이 주워 덮으니 바람도 피하고 쉴 수가 있었는데 곧 잠이 들게 되었습니다. 잠에서 깨어보니 그렇게 요란하던 포 소리가 들리지 않고 조용하며 따뜻한 햇살이 비치고 있었습니다.  웅덩이에서 나가서 저 멀리 낙동강 건너를 바라보니 넓은 모래사장이 있는데 그 모래사장 뒤쪽에 불바다가 되어 있었습니다. 비행기가 폭격을 하는 모습이 꼭 장마 때 제비가 노는 식이었는데 밤새껏 걸어갔던 인민군들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하나님의 이끄심 속의 살아온 한 평생 ③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에 의해서 인민군들이 후퇴하게 되었고 그로인해 제가 속해있던 부대도 후퇴하게 되었지만 낙동강을 도로 건너자마자 모조리 떼죽음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낙동강 너머로 죽어가는 인민군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만 나가게 되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제가 꼭 살겠다고 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죽음을 피해가게 만들어주셨다는 강한 확신이 듭니다.  국군에 가도 죽고 아군인 인민군에게 가도 탈영했다고 죽을 것이 뻔하기 때문에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어서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웅덩이에서 나왔습니다. 제대로 먹지도 못했기 때문에 배가 엄청 고팠는데 마침 인민군들이 전날 먹으려고 준비한 밥 한 솥이 그대로 있었습니다.  채 식지도 않았는데 아마도 너무 급한 나머지 먹을 여유가 없었던 것 같았습니다.게다가 개고기국도 한 솥이 있어서 배가 터지도록 실컷 먹고 또 보따리에도 많이 담았습니다. 캄캄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제가 입고 있던 인민군복장이 비를 맞고 햇볕에 쬐이기를 여러 번 반복하다가 보니 많이 탈색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밤이었지만 눈에 띌 수가 있어서 조심조심 도로를 찾아서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조그만 논두렁을 걸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앞에서 무슨 소리가 났습니다. 그런데 한국말이 아니었습니다. 납작 엎드려 풀잎 사이로 바라보니 키가 큰 미군들이었습니다. 그 미군들이 제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는데 곧 들킬 게 뻔하므로 어떻게든 이 위기를 넘겨야 했습니다.마음속으로 ‘저들은 여러 명이고 나는 혼자다.  내가 먼저 총을 쏘아 죽일 수가 있지만 모두를 죽일 수가 없기 때문에 결국 나도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방법은 한가지뿐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저들을 놀래지 않게 가장 부드럽고 가는 음성으로 인기척을 내야 한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그리하여 미군들을 향하여 “누구십니까?”라고 말했는데 그 미군들은 깜짝 놀라며 “누구야!”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알고 보니 그들 중에 통역원의 목소리였습니다.  그 통역원에게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보시오, 내가 지금 따발총을 갖고 있고 실탄도 이렇게 많은데 만약 마음만 먹었다면 당신들을 다 죽일 수가 있었소. 하지만 죽일 의사가 없었기 때문에 당신들을 죽이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해주시오.”그 통역원은 알았다고 대답하고는 미군들에게 나의 의사를 전달하였는데 그 미군들도 인정하는 눈치였습니다.  나의 부대가 어디 있느냐고 물어보아서 낙동강을 건너갔다고 대답하니 그러면 자기들을 따라가자고 하였습니다. 그들을 따라가니 1개 소대가 있었습니다. 곧 저녁식사시간이 되었는데 한 미군이 수통뚜껑에 소시지를 가져와 “짭짭” 하면서 먹으라고 권유하였습니다. 저는 속으로 ‘아하, 나에게 먹을 것을 권유하는 것을 보니 죽이지는 않을 모양이구나.’ 이렇게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저녁식사를 하고 나니 지프차 한 대가 왔습니다. 좌석이 꽉 차서 앞쪽 엔진 위쪽에 앉아 이동을 하였습니다. 조금 있으니 어떤 시골마당에 도착을 하였는데 저처럼 잡혀온 인민군들이 10여 명이 있었습니다. 마당에 말뚝을 박고 천막을 쳤는데 한 명당 가마니 2장을 주면서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 9월인데도 상당히 추워서 한 장은 발이 들어가게끔 덮고 나머지 한 장은 머리 위로 썼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바깥에 서리가 내려 온통 하얗게 변해버렸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군청쯤 되는 상당히 큰 건물로 이동을 했는데 인민군 포로들이 몇 백 명은 족히 되는 것 같았습니다. 물론 나중에는 하루에도 몇 만 명씩 들어왔지만 지금은 초창기에 속하므로 제 번호가 4757번임을 생각한다면 상당히 앞쪽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조금 있으니 팬티만 빼고 모두 벗으라고 하였습니다. ‘이제는 죽을 일만 남았구나’ 이런 마음을 가지고 차를 탔는데 도착한 곳이 부산진구였습니다.   ‘아, 이제 바다에서 죽일 모양이구나’ 이와 같은 마음을 먹고 있으니 곧 큰 트럭이 도착하여 그 트럭에 몸을 실었습니다. 저를 포함하여 다른 인민군들도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바다에 빠져 죽을 일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조금 있으니 흰색을 칠한 건물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곳은 다름 아닌 육군 병원이었습니다.인민군 포로들 중에는 부상자들이 상당수가 있었기 때문에 부상자들과 아닌 자들을 분리하여 부상자들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근데 그 수가 너무 많아 이미 한계점에 도달하여 병원 마당에 천막을 치고 침대를 깔았는데도 만원이 되어버렸습니다.그리고 저처럼 몸에 이상이 없는 포로들을 수용할 장소가 없었기 때문에 병원 마당 앞에 있는 논을 이용하였습니다. 논에는 벼가 자라고 있었는데 수확할 때는 아직 안되었지만 어쩔 수 없이 벼를 자르고 흙으로 논두렁을 만들었습니다. 또 철망을 쳐서 포로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개인용 천막 안에 6명씩 들어갔는데 논 위에 있다 보니 많은 인민군 포로들이 이질 같은 병에 걸려 죽어가는 모습을 계속 보았습니다. 하루에도 수도 없이 많은 포로들이 들어오게 되니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려우므로 포로들을 이용하여 여러 개의 수용소를 짓기도 하였습니다.그렇게 5개월 정도 시간이 흘러 다른 수용소로 이전하게 되었는데 거기가 바로 거제도 수용소였습니다.  부산은 더 이상 좁아서 수용소로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제도로 이전을 한 것이었습니다. 도착하여 보니 바닷가에서부터 쭉 들어가면서 산골 깊은 골짜기까지 수용소가 생겨서 번호가 매겨져 있었는데 제가 배당받은 수용소는 83수용소였습니다.나중에 승리제단에 와서 구세주께서 61수용소에 계셨다는 이야기를 뒤늦게 알게 되었지만 그 당시 61수용소부터 70수용소까지는 완전한 공산주의자들만 가두어 둔 곳이었습니다.  승리제단에 와서야 깨달은 사실이지만 구세주의 발자취를 저도 모르게 묘하게 더듬어 갔었던 것 같습니다.주님께서 대동군 치안대장으로 계실 때 저는 부산에서 포로생활을 하였고 또 주님께서 다시 신양리 형무소에 재수감되시어 가야수용소를 거쳐 거제도수용소로 오실 때 저도 부산에서 거제도수용소로 오게 되니 참 묘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이 죄인을 이긴자의 발자취를 더듬게 해주셨다는 생각에 감격의 눈물이 지금도 흐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끄심 속에 살아온한 평생④   박도흥(84세, 본부제단 장로)   초창기의 수용소 분위기는 대부분이 전쟁범죄자라고 자인하면서 죽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 생각하고 큰소리치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의식주와 질병이 해결되자 자본주의 이론이 싹트게 되었고 공산주의에 대한 모순을 알게 되면서 우익과 좌익으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양쪽이 큰 힘으로 발전하면서 반대파를 죽이는 일까지 서슴지 않게 되었는데 매일같이 수십 명이 죽는 것을 유엔군이 알고는 좌익과 우익을 따로 수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이 정보를 미리 알게 된 83수용소 간부들이 백지 한 장씩을 전원에게 나눠주면서 북쪽 고향에 갈 사람은 ‘북’ 자를 쓰고 대한민국에 남을 사람은 ‘남’ 자를 써서 제출하라고 하였습니다.  저에게도 백지 한 장이 왔습니다. 대대로 살던 고향인 북쪽에는 일가친척이 많이 있었지만 이미 공산주의의 모순을 알게 된 상황에서 고민에 또 고민을 하다가 어찌할까 하면서 ‘하나님이 써주세요’ 하면서 썼는데 ‘남’ 자였습니다.  다음날 아침 광장으로 전원 모이라고 하여 나가보니 전날 밤에 ‘북’ 자를 쓴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두 시체가 되어 쌓여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북쪽으로 가겠다는 그들이 북에 가게 되면 그동안 알았던 동료가 남쪽에서 반동분자로서 활동한다는 것을 보고할 테고 그러면 일가친척을 모조리 죽일 것이 눈에 뻔하기 때문에 그것을 차마 볼 수가 없어서 83수용소 간부들이 그런 결정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또 한 번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렸습니다. 글자 한 자로 죽고 사는 것이 결정되는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이 생명을 또 붙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 당시 수용소마다 달랐는데 제가 있던 수용소와 반대로 진행된 곳도 있었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유엔군의 지시만 받은 데도 있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수용소 정문 쪽에 헌병들이 대기해 있고 군용트럭이 많이 와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북으로 가고 싶은 사람은 군용트럭을 타고 남으로 가고 싶은 사람은 이중철망사이로 들어가는데 혹시나 있을 죄수들끼리의 싸움을 생각하여 10미터 간격을 두라고 했습니다.  드디어 선택의 순간이 오자 전부 우르르 뛰어 갔습니다. 물론 저는 이중철망사이로 들어갔습니다. 군용트럭을 탄 사람들은 놓아두고 남으로 가겠다는 사람들은 전부 육지로 나왔습니다. 부산 가야수용소에 잠깐 있다가 그 다음 대구 영천수용소로 갔습니다.  거기에 가니까 우리들보다 먼저 1차 석방된 사람들이 있었는데 바로 주님을 포함한 포로 아닌 포로, 즉 인민군이 아니면서 포로로 붙잡힌 사람들이었습니다. 설교말씀도 계셨지만 주님께서는 저보다 먼저 거제도를 떠나 영천수용소에서 석방되실 때 12만 포로를 대표해서 답사를 하셨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영천수용소에 있던 사람들은 곧 풀려날 것이라는 떠도는 소문에 마음이 들떠 있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쉽게 풀리기 힘든 점이 있었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이승만 대통령은 즉시 석방을 해주고 싶었지만 영천수용소를 지키고 있는 군인 절반 이상이 유엔군이다 보니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한날 밤중에 갑자기 이승만 대통령이 수용소를 지키고 있던 한국 헌병들에게 지시를 내렸습니다. 미리 절단기를 통하는 사람끼리 안으로 몰래 숨겨두고 미군을 잠시 영창에 감금한 다음 일제히 석방을 시키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유엔군을 대상으로 그렇게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는 것은 그 당시 온 세계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고 이승만 대통령을 영웅으로 승격시키기에도 손색이 없었습니다.  그런 대통령의 과감한 결단으로 인해 수용소 사방에 있던 철창은 구멍이 생겼고 수용소 감시소에서는 공중에 대고 사격을 막 해댔습니다. 미리 연락을 받은 천막들은 다 빠져나갔지만 제가 있던 천막에는 연락이 되지 않아서 처음에는 무슨 전쟁이 난 줄 알고 그냥 있었습니다.  그래도 제가 소대장이다 보니 그냥 있을 수만은 없기에 조심스레 밖을 살펴보니 옆의 천막에는 벌써 아무도 없기에 저 멀리 철망을 바라보니 구멍이 뚫려 있는데 거기로 헤드라이트가 비치고 있고 그쪽으로 총탄이 마구 날아가고 있었습니다. 마음속으로 아차! 한발 늦었구나 하고 외쳤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보니 제가 있던 천막처럼 연락을 받지 못해서 탈출을 하지 못한 사람만 해도 십만 명이 훨씬 넘었습니다. 그렇게 탈출을 못한 사람들은 다시 부산으로 가게 되었고 전쟁포로 때문에 또다시 대한민국과 북한은 의견충돌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김일성은 대한민국이 강제로 포로들을 억류하고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승만 대통령은 본인들이 가기를 희망하지 않으니 어쩔 수 없는 게 아니냐 하고 주장하면서 그러면 너희들이 직접 와서 설득해서 데려가라고 맞대응하기에 이르러 결국 중립국 대표 감시위원단이 파견되어 그들의 감시 속에서 북한의 장교들이 포로들을 설득하게 되었습니다.  휴전선 중앙에서 90일 동안 진행되었는데 북한에서 온 인민군 장교들은 하나같이 말을 잘하는 사람들이었는데 포로인 우리들을 향해 눈물을 흘리면서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거론하며 인정에 호소하였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공산주의를 경험했고 또 그 공산주의의 맹점을 이미 알고 있는 터라 더 이상은 우리들의 마음을 돌릴 수가 없었습니다.  포로들 중에는 대놓고 인민군 장교를 향해 거짓말한다며 삿대질을 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들도 종종 있었습니다. 그렇게 설득기간 90일이 다 지나고 있었는데 북으로 다시 가겠다고 마음을 돌린 사람은 불과 십여 명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김일성은 더 이상 안 되겠다는 판단을 하여 철수명령을 내렸습니다.  전 세계가 지켜보고 있는 상황에서 김일성은 정말 개망신을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그때까지만 해도 공산주의가 좋다고 생각하는 그런 국가들도 상당수가 있었던 터라 그 사건은 공산주의가 안 좋다는 것을 명백히 증명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우리들 전부는 자유민주주의인 대한민국의 품안에 안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 거의 전부는 북한에 기반을 두고 있었던 터라 먹고 살 일이 막막했기에 저는 국군에 지원하게 되었고 그 이튿날 제주도 훈련소에 입소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또한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끄심 속에 살아온 한 평생 ⑤     박도흥(84세, 본부제단 장로) 포로생활을 접고 국군에 지원하게 되었는데 곧바로 제주도 훈련소에 입소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제주도 훈련소의 규모는 전 세계에서도 손꼽을 정도로 엄청났고 훈련강도 또한 일본인들이 행했던 훈련방식을 그대로 도입했기 때문에 민주주의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 일방적인 훈련이었습니다.그래서 훈련받다가 죽는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그때 지어진 ‘모슬포 빵고지에 고동이 울면…’ 이라는 노래가사를 저도 자주 부르곤 했습니다. 물론 그 노래를 우리 주님께서 직접 작사하셨다는 이야기를 승리제단에 와서 전해 듣고는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여기서 ‘모슬포 빵고지’라는 말에 대해서 잘 모르시는 분들이 많은데 그 당시 훈련받았던 산에는 사람크기 만한 소나무들로 꽉 차 있었고 밑에서부터 포복을 하여 꼭대기까지 기어 올라가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소나무 사이 사이로 빵장수 아주머니들이 장사를 하였답니다.그 빵장사 아주머니들은 훈련장교들의  빽을 업고는 장사를 하였는데 장사만 하면 엄청나게 돈을 많이 벌수가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최소한 10배 장사를 하였으니 장사가 안 될 수가 없었습니다. 포복을 하고 기어 올라가다가 너무너무 힘든 고로 배가 고파서 빵을 사먹는 것이 아니라 잠시라도 쉬고 싶어서 빵을 사먹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보니 빵을 먹을 때도 조금씩 먹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고 그 누구도 빵 먹는 시간만큼은 방해하지는 않았습니다.그렇게 제주도 훈련기간을 포함하여 만 2년간의 군대시절을 끝으로 1956년 4월에 만기제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막상 제대를 하고 보니 할 일이 없어서 잠시 방황을 했는데 우연찮게 알고 지내던 교회 장로를 통해 전도관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지도 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이 생명을 지켜주고 사랑해준 존재가 예수라는 존재로 착각했던 것이었습니다.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 주님께서이기시고 제가 졌던 것입니다. 만약 그 당시 제가 이겼다면지금 이 순간 저는 이 승리제단에 남아있지 못하고 또한이 귀한 영생의 은혜를 받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어떻게 하면 잘 믿고 똑바로 믿을 수 있게 해주는 곳이 어딜까 하고 찾아다녔던 것이었습니다. 전도관에 가서 박태선 영모님의 말씀을 들어보니 정말로 예수님을 등에 업고 역사하셨기에 제대로 된 신앙을 할 수 있겠다 싶어 제 1신앙촌과 덕소신앙촌에 입주까지 하면서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다가 1963년도쯤에 갑자기 모든 것이 앞뒤가 맞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되어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되겠다 싶었고 그 길로 발길을 돌리게 되었습니다.발길을 돌려 살펴보니 삼익피아노에 취직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삼익피아노의 사장이 순복음교회의 교인이었고 또 조용기 목사가 공장까지 직접 와서 예배를 인도하기도 했습니다. 신앙촌의 박태선 영모님의 설교를 듣다가 조용기 목사의 설교를 들으니 이건 게임이 되지도 않을 만큼 형편이 없었고 유치하게 들렸지만 그래도 예수만큼은 놓을 수가 없었기에(왜냐하면 저를 살려준 그 하나님이 예수 하나님으로 여겼기에) 그대로 묵묵히 순복음교회의 교인으로서 살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1986년도쯤, 알고 지내던 강목사라는 분이 저에게 이런 말을 던졌습니다. “산에서 수도를 많이 해서 성공하신 위대하신 분이 역곡에 계시는데 한번 가서 알아봅시다.” 계속해서 권하기에 한번 속는 셈치고 설교 장소에 가보았습니다. 처음 설교말씀을 들으니 전부다 거짓으로 들리고 또 무슨 말을 하는 지조차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을 마귀라고 쳐버리니 제 마음 속에서는 어떻게 하면 이 원수를 갚을 수 있을까 라는 생각만 맴돌게 되었습니다.이튿날 일요일 오전에 여의도 순복음 교회에 가서 조용기 목사의 설교를 듣고 나와 버스를 탔습니다. 강목사의 부탁에 의해 체면상 역곡에 안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 날은 저의 마음이 절박했습니다. 그래서 버스 안에서 ‘예수님, 지금 예수님을 마귀라고 치는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바로 가르쳐 주세요.’ 라고 계속해서 마음속으로 외쳐댔습니다.역곡에 도착하여 시간을 보니 약간 여유가 있었습니다. 마침 승리제단 정면 맞은편에 교회가 있기에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고 있는 교회니까 이 교회목사에게 물어보면 정확한 말을 해줄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가보니 학생들이 있기에 목사님이 어디에 계시냐고 물어보니 지금 자리를 비워 안 계신다고 하여 할 수 없이 그냥 나와 주위를 배회하다가 시간이 되어 승리제단으로 들어갔습니다.역시 그날도 설교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고 오직 원수를 갚겠다는 생각만 하다가 시간이 흘렀습니다. 예배가 끝난 후에 주님과의 친견이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저 뿐만 아니라 새로 오신 많은 새식구가 있었는데 대화를 어느 정도 진행하다가 주님께서는 어떻게 된 건지 저하고만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주님께서 성경통시과를 하셨다는 말씀을 들었는데 저도 거제도 83수용소에 있을 당시에 성경통시과를 하였기에 웬만한 성경구절은 거의 외울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성경구절을 인용하여 말씀하시면 저는 빈정대면서 “그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감히 겁도 없이 대꾸하였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맞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사람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잠재의식을 통하여 바른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 말에는 저도 고개를 끄떡였습니다.시간이 많이 흐르자 주님께서는 저에게 “내일도 나오셔야지요?” 이렇게 물어셨는데 저는 “못나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내일 꼭 나오셔야 됩니다.” 하니 “말로만 해서는 안 되니 책자를 주세요?”라고 물었고 주님께서는 “내일 구해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저는 “그래도 내일은 못나옵니다.” “내일이 중요한 겁니다.” “못나옵니다.” “나와야 됩니다.” “못나옵니다.” “꼭 나오셔야 됩니다.” … 저는 ‘이 사람도 정말 대단한 사람이구나! 어떻게 똑같은 말을 이렇게 할 수가 있나.’ 속으로 생각하고는 “그럼, 나오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이렇게 굴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노력해보는 것 가지고는 안 됩니다. 꼭 나오셔야 됩니다. 약속해요.”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 주님께서 이기시고 제가 졌던 것입니다. 만약 그 당시 제가 이겼다면 지금 이 순간 저는 이 승리제단에 남아있지 못하고 또한 이 귀한 영생의 은혜를 받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으로서는 갈 수가 없는 길을 걸어오셨고 그리고 그 길을 개척하신 선구자이십니다. 우리들은 그 선구자가 닦아놓으신 길을 그대로 따라가야 합니다. 그래서 전 인류가 이 영생의 길을 모두 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이끄심 속의 살아온 한 평생 ⑥  일요일 예배 후에 주님실에서 신경전을 펼치다 결국 주님께서는 다음날에도 오겠다는 다짐을 받고나서야 말씀을 멈추셨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주님께서는 요놈이 보통 마귀가 아니라고 여기시어 철저히 이기시려고 하셨던 것 같습니다.말씀을 끝내시더니 이제 밖으로 나가자는 말씀을 하시며 제 손을 붙잡으셨는데 이끌리어 나가보니 또 차에 타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얼떨결에 차에 탔는데 이미 날은 저물어 밖이 어두웠습니다. 소사삼거리까지는 알겠는데 그 다음부터는 처음 가보는 곳으로 집도 없고 산골짜기로 계속해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겨우 차 한 대가 들어가는 좁은 길로 계속 들어가더니 마침내 어떤 곳에 도착을 하였습니다.  여기가 바로 밀실이라고 주님께서는 말씀을 하시더니 거기서 당신이 연단을 받고 이긴자가 되셨다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더불어 주님께서는 앞장서서 밀실 여기저기를 소개해주셨는데 그 당시 저는 밀실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그냥 설명을 해주시니까 그러나보다 하고 여기며 무덤덤하게 지났으나 아마도 주님께서는 제 속의 마귀를 죽이기 위해서 그러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과의 약속 때문에 마지못해 다음날 나갔는데 주님은 반가이 맞아주시면서 “승리제단의 정체를 확실히 알아보시려면 21일을 계속 나와야 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약속 때문에 마지못해 하루 더 나왔는데 21일이라니 순간 주춤하다가 ‘옳지,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속으로 들어가라는 말이 있듯이 이왕 이렇게 왔으니까 이단집단의 정체를 확실히 알아야겠다.’ 이렇게 생각하고는 못이기는 척하고 21일을 약속하였습니다.  우선 제가 평생 믿어오던 예수가 왜 마귀고 또 조희성이가 왜 구세주인지를 알기 위하여 귀를 100% 열고 말씀을 노트에 적으면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들었습니다. 제일 먼저 놀란 점은 주님의 음성이 제가 전도관에 다닐 때의 그 옛날 영모님 음성과 똑같다는 것이었고 그 다음으로 놀란 점은 우리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 중 장손인 단지파요 구세주가 나올 민족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안 그래도 저는 성경 속에 나오는 단지파의 행방불명된 점을 항상 궁금하게 생각했는데 바로 그 단지파가 우리민족이라는 말씀을 들으니 놀람의 연속이었습니다. 모세는 만나를 내려 굶어죽지 않게 하고 가나안 복지로 인도한 육신의 구세주이지만 우리 주님은 감추었던 만나로 영생의 복지로 인도할 마지막 구세주인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더욱 최고로 크게 놀란 점은 사망권세를 쥐고 있는 사자마귀가 나라는 의식 속에 꼭꼭 숨어서 6천년 동안 한 사람도 놓치지 않고 모두 죽였다는 점이었습니다. 이 모든 사실을 깨닫게 되니 21일이 아니라 약 1주일 만에 앞 뒷발 번쩍 들고 주님께 항복했습니다. “주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눈물로 부탁을 드렸더니 주님께서는 웃으시면서 안찰을 해주셨고 더욱 열심히 나와서 알아보라고 하셨습니다.  제단에 온 첫날부터 집에 가서 밤잠을 제대로 잔 날이 없었습니다. 자려고 눈만 감으면 수백 마리의 큰 구렁이와 뱀이 서로 엉기어 꿈틀대면서 싸우는 모습이 나타나 보이는고로 1주일 동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는데 안찰을 받고나니 구렁이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아 편안히 잠을 잘 수 있게 되었고 무사히 21일을 마칠 수가 있었습니다.  21일을 채우고 나니 귀가 열리면서 진리임을 확실히 알게 되었고 또 예수가 마귀라는 사실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그리고 무엇보다도 예배시간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주님께서 6.25전쟁 중에 포로생활을 하셨다는 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신양리 형무소나 거제도 포로수용소, 그리고 제주도 훈련소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게 되면 이미 그것은 주님의 이야기가 아니라 저의 일처럼 느껴졌고 저의 두 귀는 곤두세워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더욱더 주님의 말씀이 가까워졌던 것 같습니다.승리제단에 와서 주님을 알고 그리고 이 진리를 알면 알수록 더욱더 확실해지는 것은 이 진리가 너무나도 확실하다는 것이었고 또한 사람으로서는 갈 수가 없는 길이라는 것 또한 동시에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형식적으로는 갈 수 있겠지만 진정으로 이 길을 간다는 것은 사람으로서는 갈 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길을 가더라도 주님께 누가 되면 되었지 보탬은 되지 못할 존재라고만 계속 생각이 맴돌아 결국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주님께서 여태까지 돌봐주시고 사랑해주셨던 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더 이상 주님을 보필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내일부터는 제단에 나올 수가 없습니다….’ 라는 내용의 편지를 그 당시 총무에게 전달했습니다.다음 날,  주님께서 보고를 받으시고는 그 총무에게 어떻게 관리를 했기에 그 사람이 이렇게 되었느냐며 호통을 치시며 저를 많이 찾으셨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전해 들었습니다. 저 또한 그렇게 편지를 쓴 후에 하염없이 눈물을 펑펑 쏟으며 주님께 해서는 안될 짓을 했다는 자책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도저히 그냥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제단에 다시 나왔습니다.주님께서는 그때까지 제단에 계셨는데 저를 보시고는 얼싸안으며 우셨습니다.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또 제가 편지를 제출하고 나서 너무 마음이 괴로워 자꾸 눈물이 나서 울었다고 말씀을 드리니 주님도 “나도 울었어”라고 말씀을 하시며 저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하마터면 주님을 감히 배신할 뻔 했던 적도 있었지만 우여곡절 속에 지금까지 이 영생의 진리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며 신앙생활을 해왔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승리제단에 나오면서 여러 가지 어려운 사건들을 많이 보아왔지만 그 어려움 속에서 백만승리제단을 세운 것은 기적 중의 기적이요 축복 중의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건축 지을 땅 값에 계약금이 없을 정도의 빈약한 그 당시 사정상 승리한 하나님이 아니면 불가능한 큰 공사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계약 때부터 완공까지 하루도 안 가본 적이 없었기에 더욱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냥 집 하나를 지은 것이 아니라 그 옛날 노아의 방주에 비견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주님의 7년 옥고생활과 그리고 재수감, 사형선고는 하늘과 땅이 무너지는 일이었으나 승리하신 하나님 구세주께서는 진짜 엄마의 한없으신 사랑의 심정으로 무죄로 만드시고는 보광하셨습니다.  24년 긴긴 세월 피와 땀 모두 짜서 먹여 키운 승리제단의 자식들을 조금이라도 더 구원하시려고 엄마께서는 고생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몸이 가루가 되어도 내 새끼들은 고생을 시키지 않으려는 한도 끝도 없는 진짜 사랑의 보광이셨습니다. 주님의 그 끝없는 사랑에 대해 저희들이 조금이나마 보답을 할 수 있는 길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자유율법을 저희들이 몸소 실천하여 세상의 빛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끝)*
온세계 만방에 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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