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무렵

추석 무렵
맹문재

 

흙냄새 나는 사람들의 사투리가
열무맛처럼 담박했다
잘 익은 호박 빛깔을 내었고
벼 냄새처럼 새뜻했다
우시장에 모인 아버지들의 텁텁한 안부 인사 같았고
떡집 아주머니의 손길 같았다.
빨랫줄에 널린 빨래처럼 편안한 나의 사투리에도
혁대가 필요하지 않았다
호치키스로 철하지 않아도 되었고
인터넷 검색이 필요 없었다
월말 이자에 쫓기지 않았고
일기예보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흙냄새 나는 사람들의 사투리를 태운
시내버스 운전사의 어깨가 넉넉했다
구멍가게 할머니의 얼굴이 사과처럼 밝았고
우체국에서 나온 사람들이 여유롭게 햇살을 받았다
이발사들의 가위질 소리가 숭늉처럼 구수했고
신문 대금 수금원의 눈빛이 착했다.

요즘은 아침저녁으로 날씨가 서늘하고 한낮에는 뜨겁다. 햇살에 힘입어 골목골목 담장너머로 감, 대추, 석류들이 탐스럽게 익어간다. 저 부지런한 자연을 보며 그 자연에 합류하지 못하는 자신이 부끄럽다.

추석 전날엔 오랜만에 비가 억수처럼 오는데 어머니와 나는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멀리 있는 수산시장에 갔다. 한 마리에 10만원이 훨씬 넘는 킹크랩(왕게) 두 마리를 어머니는 주저하지 않고 골라서는 삶아 포장해 달라고 했다. 1년에 한두 번 보는 귀여운 외손녀들이 추석날 오기에 일이백 원도 아끼시는 어머니가 그날은 돈이 아까운 게 전혀 없으신 것 같았다.

다음날 아침 가족들 모두 팔공산 고향마을에 갔다. 일가친척들이 다 함께 모여 시골집에서 합동제사를 지냈다. 혼자서 어린 두 아이를 일 다니면서 키우느라 고생하던 6촌동생은 새장가를 들어 반듯한 가족의 모습을 갖추었다. 명절때마다 늘 주눅들어 보이던 두 아이도 새엄마가 생기고 나니 얼굴에 생기가 돌고 발랄해졌다. 또 다른 나의 6촌동생은 정신 지체장애가 있는데 명절 때마다 보면 언제나 밝고 명랑한 모습이다. 그의 누나와 부모가 되는 5촌 아제내외가 늘 따뜻이 보살펴서 그런 것 같다. 작은집에 사촌 여동생도 이혼을 하고 혼자서 두 아이를 키우고 있는데 그나마 작은 아버지 내외와 사촌 남동생이 신경 써서 함께 돌보니 아이들이 늘 명랑하다.

사람들에겐 누구나 고향의 뒷산이나 엄마 품같이 푸근하게 비비고 안길 구석이 있어야 마음도 안정되고 살맛이 난다. 특히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는 그런 영원한 내편이 존재해야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느끼며 잘 자랄 수가 있다는 것을 친척아이들을 보면서 새삼 깨닫는다. 제사를 모시고 어른들이 음복을 권하셔서 막걸리 반잔을 마시고 다시 뒷산 성묫길에 올랐다. 가을 햇살을 맞으면서 정다운 시골의 골목길을 걸어 올라갔다. 올라가면서 바라보는 초록이 짙은 고향 뒷산이 참으로 아름답고 아늑했다. 늘 집안의 대소사로 일을 제일 많이 하시던 큰 어머니도 요양원 신세를 진지 오래되셨는데 오늘 하루는 외출하셔서 부축을 받으며 함께 뒷산에 올랐다. 벌초하느라 팔에 무리가 갔던지 통증이 와서 한의원에 다녀왔다는 연세 많은 5촌 아제의 말씀을 듣고는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집안의 종손이 되는 5촌 조카는 오늘 시골에 오지 않았다. 모든 면에서 평등을 지키는 요즘 세대의 추세에 따라 명절도 추석은 아내집 행사에 참여하고 설날은 남편집 행사에 참석하기로 규칙을 정했기 때문이다. 어떤 신세대 가족은 명절이면 남편은 본가로 아내는 친정으로 간다고 한다. 신세대들이 진정으로 즐겁고 편안한 명절을 누리기 위해 만든 새로운 풍습을 구세대들은 탐탁치 못하게 느끼긴 하지만 꼰대란 소리를 듣기 싫어 꾹 참기도 하고 한편 이해하려고 애쓰는 모습이다. 명절이 지나면 변호사들은 이혼상담으로, 정신병원은 명절 스트레스 치료로 뒤늦은 대목이라고 하는데 젊은이들의 새로운 풍속이 오히려 미리 큰 불씨를 끌 수 있는 현명한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시골에서 돌아와서 저녁에는 형님내외와 누나들내외와 질녀들이 어머니댁에 오랜만에 모여서 그간 못다한 이야기로 웃음꽃을 활짝 피웠다. 형님 조카는 군대에 있는데 군생활을 잘해서 상장도 두 개나 받고 상사로부터 말뚝박으라고 권유받는다고 해서 모두가 한참을 웃었다.

다른 여느 집안에서도 그러하겠지만 우리집안에는 고부갈등이 심해서 2년정도 형수님이 어머니댁에 오지 않았다. 두 분 다 성격도 좋으시고 대인관계도 원만하신데 사소한 문제로 갈등이 빚어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형수님이 어머니께 찾아왔다. 내가 형수님께 바다처럼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라고 하니 자기 마음은 원래 태평양이란다. 내가 고랑이 아니냐고 농담을 쳤다. 여하튼 어머니와 형수님이 화해를 해서 기분이 좋다.

큰누나의 큰질녀는 간호사라 오늘도 근무를 했는데 퇴근길에 소환을 받아서 다시 출근해야 한다면서 롤케이크와 인사만 남기고 돌아갔다. 업무량이 많아 바짝 마른데다 지친 모습이 안쓰럽기 그지없다. 작은 질녀도 대학병원의 수술실에서 근무하는데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언제 사직서를 쓸까만 고민 중이란다. 큰병원에서는 보험수가가 낮아서 그런지 간호사와 의사의 일인당 담당하는 환자수가 너무 많은데 의사, 간호사뿐 아니라 환자를 위해서도 제도적 개선이 있어야 할 것 같다. 여하튼 온가족이 별탈없이 잘 지내는 모습을 보니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추석은 주위분들에게 보살펴 주심에 대해 감사를 드리고 또한 소외받고 어려운 이웃들을 한번 더 돌아보고 보살펴드리는 절기다. 모든이가 작은 선물이라도 서로 주고받으며 온정을 나누는 아름다운 절기가 되었으면 한다.

사실 나는 올추석엔 돈선물도 받았다. 작은 누나의 큰 질녀가 첫월급을 탔다고 용돈을 줬다. 삼촌노릇도 못하고 용돈을 받으려니 겸연쩍기가 그지없다. 또 하나의 돈선물은 4년전 우윳값 미수고객으로부터의 송금이다. 그 고객은 아내가 먹는 우유니 우윳값이 밀리더라도 꼭 갚을테니 중지하지 말아달라고 해서 100만원 가까이 미수가 되도록 넣어주었다. 2년전부터는 연락도 안닿았는데 이번 추석 이틀 전 연락을 주고 절반을 송금해 주었다. 돈도 돈이지만 나는 그가 약속을 지켜줘서 너무 고마웠다. 나는 그가 하는 사업이 다시 활기를 회복했음에 축하의 말을 전했다. 문득 내가 20대 때 나 자신에게 한 약속이 떠올랐다. 이 땅 사회적 약자들과 고통을 함께 하며 그 고통을 해결하는 데 힘을 쏟겠다고 한 약속. 그 약속을 얼마나 실천하는지 하루하루 돌아보고 나 자신에게 질문을 하며 나태함에 일침을 가해야겠다. 나도 그이처럼 나에게 한 오래된 약속을 지키고 싶다.
라준경/ 대구승리제단 책임승사

온세계 만방에 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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