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회, 불로불사에 도전하게 되기까지 나의 삶

작성자 : 최고관리자Date : 2015-12-15 16:40  |  Hit : 2,506  
 입문수기 첫번째회, 불로불사에 도전하게 되기까지  나의 삶  
시민초청강연회에서 사회를 보는 김주호 승사

  지금으로부터 24년 전, 그러니까 1992년 24살이었던 젊은 시절. 나는 길가에 흔히 있는 돌, 아니면 들에 널려 있는 볼품없는 풀과 같은 그런 존재였다. 속된 말로 그냥 그렇고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세상 나이 마흔 여덟이 되었지만, 영육 간 찬란한 황금보석으로 다듬어진 영생의 불멸(不滅)의 나무가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도대체 이런 극적이고도 거창한 말로 첫 부분을 시작하는 한 인간의 삶이 과연 어떠했으며 무슨 변화가 있었기에 그럴까? 평범한 한 인간에 불과했던 과거의 인생, 그리고 평범한 사람으로 도저히 갈 수 없는 오늘날의 불로불사의 위대한 도전과 새로운 차원의 멋진 모험을 하게 된 선구자가 되기까지의 지나온 인생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한다.
 초등학교 때는 노는 것이 일이었다
 대한민국 최남단 땅 끝 해남읍에서 1968년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기억에 없는 유아기는 여느 보통 아이처럼 배고프면 울고, 배부르면 호기심어린 눈으로 사물을 만지고 놀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소년시절은 땅 끝 마을 해남의 따스한 햇볕이 좋아 조는 것이 행복했던 느낌이 있다. 우리 집은 운전을 하시는 아버지와 집안의 가계를 돕고자 장사를 하시는 어머니, 그리고 바로 밑에 남동생과 막내 여동생으로 3남매의 단출한 가족이다. 외적으로 보면 우린 가난하게 살 수 없었다. 부모님이 건강하시고 3남매 또한 건강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집은 가난하여 이사를 자주 했다. 그것은 술을 좋아하는 아버지 때문이었다. 당시만 해도 운전해서 살기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지만, 아버지는 월급을 제대로 어머니에게 가져다 준 적이 없었다. 가족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는 새벽같이 봉두난발하시고 자식들을 키우시기 위해 시골장과 부락 부락을 누비시고 저녁에나 돌아오셨다. 해남읍 장이면 어머니를 도와서 리어커도 끌기도 하고 심부름을 하기도 했다. 어렸지만 가난이 싫었고 부끄럽기까지 했다. 나는 아버지처럼 그렇게 살지 말아야지 스스로 각오를 다졌다. 아버지는 남자들이면 으레 해야 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술, 여자, 도박 따위로 인해서 그러했던 것으로 철이 들어 짐작이 갔다. 
 소년시절 뚜렷했던 기억은 아침에 학교에 등교해서 하루 종일 뛰어놀다가 저녁에 집에 들어갔다. 그 때는 학교에서는 열심히 축구공을 차며 뛰어놀았고, 집에 돌아와서는 넓은 동네 길에서 작은 테니스 공으로 정신없이 뛰어놀았다. 그렇게 뛰어놀아도 피곤한 것을 몰랐다. 부모님이 자식에 대해 신경 쓸 겨를이 없었으니, 공부가 무엇인지도 몰랐고 화목한 가정이 무엇이라는 것을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하루 종일 뛰어놀다 저녁이면 집에 들어가 밥을 먹고 자면 그만이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한창 산업화로 눈부신 경제발전을 도모하던 시절이지만 여전히 시골은 살기가 썩 좋질 않았다. 초등학교 시절만 해도 잘 사는 집에나 흑백TV가 있어 재미있는 프로를 하면 동네 사람들이 한데 모여 시청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또 당시만 해도 바나나나 파인애플 같은 외국 과일이 귀해서 잘 사는 집에서나 얻어먹곤 했다. 해가 떠 있는 낮에는 열심히 밖에서 뛰어놀다가 저녁때에 들어와도 부모님은 와 계시지 않았다. 그러면 쓸쓸한 마음으로 동생들과 밥을 차려서 먹을 수 있도록 직접 준비했다. 밥을 퍼서 있는 반찬을 차려 식어 있는 국을 끓여 먹고 나서 설거지도 하였다. 방이 어질러져 있으면 쓸고 닦기도 하였다. 어려서 자기중심적으로 어리광부리고 떼를 쓰는 그런 연속극 같은 이야기는 내겐 없었다.  일찍부터 동생들을 생각하고 늦게 들어오시는 어머니를 대신해서 부엌일을 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조숙해져 갔다. 그 나이에 차라리 ‘여자로 태어났으면 숙명으로 알고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차라리 속이 편할텐데’라고 생각도 해보았다. 그 당시만 해도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부모님께 용돈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국민학교 때는 학교에서 국가 차원에서 장려하는 저축을 했는데 어머니한테 저축을 한다고 하면서 이 돈으로 군것질을 일삼았다.  한참 먹을 나이라서 돈이 없을 때는 쌀을  먹고, 콩을 볶아서 먹으며 왕성한 식욕을 달랬다. 그 여파로 지금 나의 이는 많이 닳아 있다. 또 어머니가 튀김해 주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배워가지고 스스로 튀김도 많이 해먹었다.  초등학교 때는 키가 보통 아이정도였다. 당시 대한민국 국기인 태권도는 웬만한 사람이면 한번쯤은 다 해보았음직하다. 
아버지처럼 되지 말자고 다짐하다
 5학년 때 학교 대표로 태권도 시합에 나갔을 때 있었던 일로 지금 생각해도 쓴웃음 짓게 하는 재밌는 이야기가 있어 실어 본다. 해남에는 동국민학교와 서국민학교가 있었는데, 아마 보이지 않는 라이벌 의식이 있었던 모양이다. 동국민학교 대표로 서국민학교에서 대회를 치렀다. 파란 띠를 두르고 서국민학교 출신의 검은 띠를 두른 선수와 시합을 했다. 시합은 내가 약간 키가 크고 빨라서 공격적으로 주도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나는 어디선가 ‘시합을 할 때 껌을 물고 하면 긴장하지 않아 잘 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시합을 하면서 껌을 물은 게 문제가 됐다. 심판이 경기를 중단하고 한쪽으로 불러서 주의를 주자 마음이 불안하고 위축되었다. 경기는 우세하였으나, 껌을 물고 했다고 해서 불리하게 작용하여 지고 만 것이다. 물론 어린 나이에 껌을 물어서 졌다는 것이 상심이 되었으나, 예민한 성격이 아니니 그때뿐이었다. 
 초등학교 때 인성적인 큰 변화를 겪은 사건이라면, 며칠만에 들어오시는 아버지의 술주정과 어머니의 불만이 충돌하여 집안에서 다툼이 일어나려 치면 아버지는 밥상을 들러엎으시기 일쑤고 밤늦도록 고래고함을 치시니 집에서 잠을 잘 수 없었다. 자식들 뒷바라지를 하느라 여간 힘드시는 게 아닌데 아버지는 자기 기분대로만 사니 어머님의 마음고생이 심하셨다. 어머니는 누구하고 큰 소리로 시비하거나 싸우는 것을 보지 못할 정도의 전형적 시골 아낙네처럼 유순하시고 선한 분이셨지만 일주일이면 몇 차례 난리를 피우시는 아버지 때문에 속이 상하고 괴로워 하셨다. 아버지는 술을 안 드실 때는 그렇게 점잖고 근면한 분인데 술만 드시면 지나갔던 시간 속에서 쌓인 감정을 술기운을 빌어 불만을 털어놓고 소리를 지르며 소란을 피우셨다. 
 그럴 때면 나는 동네 주위를 배회하기도 하였고, 혹은 주인 집 농기구 창고에 몰래 들어가서 불안에 떨곤 하였다. 그럴 때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부닥치는 현실이 괴롭고 고통스럽게 여겨져 만약 약을 먹고 죽으면 어떨까, 목을 매달아 죽으면 어떨까, 칼로 찔러서 죽으면 어떨까 하는 고민을 하게 된 것이다. 약을 먹고 죽으면 게거품을 물고 발광하겠지, 목을 메달아 죽으면 숨이 막혀 발버둥을 치겠지, 칼로 찌르게 되면 그 예리한 칼이 살을 벨 때,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상상해 본 것이다. 어린 나이에 자살을 떠올리면서 죽는 모습을 상상해 보니, 죽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끔찍스럽게 느껴지며 싫어지는 것이었다. 어린 마음에 자주 빚어지는 부모님의 불화와 다툼이 심히 영향을 끼쳐 불안과 초조가 극에 달했으리라. 
 공부가 뭔지도 모르고, 뭘 열심히 배워야 한다는 생각도 없이 맘껏 뛰놀던 초등학교 시절이 그렇게 눈 깜짝할 세 지났다. 겨울방학을 지나고 중학생이 되니 갑자기 초등학교 때 보통 키가 대나무처럼 쑥 커서 168cm 정도가 되었다. 키순으로 중간쯤이었는데 거의 제일 뒷번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한창 키가 클 때, 밤마다 꿈을 꾸면 높은 성에 사다리를 타고 기어 올라가다가 매번 떨어지는 꿈을 꾸곤 하였다. 또 징그러운 뱀에 놀라 쫓겨다니는 꿈을 자주 꾸었다. 그러더니 키가 쑥쑥 자란 것이다.* 
                                                                                                              김주호 승사 / 본부제단 
온세계 만방에 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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