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령이 나오면 좋은 세상 된다는 외조부 말씀, 마음에 새겨 둬(上)

나는 외가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어머니가 김해 김씨 경파 가문의 무남독녀였던고로 아버지가 외조부의 데릴사위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외할아버지는 배움이 많은 분은 아니었지만 한글과 고문(古文)을 읽을 줄 아셨다. 부모님은 들에 나가 농사일을 하시기 때문에 자연히 외할아버지와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았다. 저녁때가 되면 동네 어른들이 사랑방으로 놀러 오셔서 외할아버지보고 이야기 책을 읽으라고 하였는데 외할아버지의 책 읽는 항성(‘학성鶴聲’의 전남 방언) 소리가 좋다고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조웅 전(傳), 유충렬 전, 곽해룡 전 등을 읽으셨는데 동네 노인들이 긴 담뱃대로 담배를 피워대면 눈이 매워서 쩔쩔맸던 기억이 난다.

 

어린 시절 겪은 전쟁의 참혹함

초등학교에 입학한 1948년도 가을에 여수·순천사건이 일어났다. -제주4·3사건과 함께 해방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좌익과 우익의 대립으로 빚어진 민족사의 비극적 사건이다. 이승만 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강력한 반공국가를 구축하였다. 흔히 여순반란사건이라고 하였으나 해당 지역 주민들이 반란의 주체라고 오인할 소지가 있다고 하여 1995년부터는 ‘여수·순천사건’ 또는 ‘여수·순천 10·19사건’이라고 사용한다.[네이버 지식백과]

다음날 낮에 밖에 나가보니 골목길과 신작로 길가에 사람 죽은 시체를 긴 가마니로 덮어놓은 것이 보였다. 그때 반란군들은 경찰 가족이나 공무원 가족, 동네 부자들을 주로 죽였다고 한다. 참혹한 광경이었다.
그 후 초등학교 3학년 때에는 6.25 전쟁이 터졌다. 7월 하순 경 여름 한참 더울 때였다. 이웃집에 있는 큰 감나무 그늘에서 동네사람들과 같이 더위를 식히고 있는데 갑자기 순천 시내 쪽에서 쾅쾅쾅쾅! 하는 요란한 폭음소리가 20리 이상 떨어진 해룡면에까지 들렸다. 마치 지진이 난 것처럼 땅도 흔들렸다. 집에 와서 보니 선반 위에 얹어 놓은 물건들이 방바닥에 떨어져 널브러져 있고, 등잔불 석유기름 종자기도 엎어져 있었다. 난생 처음 들어보는 폭음이었다. 그 폭음은 나중에 알고 보니 경전선 순천 철교를 끊어버리기 위해 미군 B29 비행기에서 폭탄을 대량투하한 것이었다. 그 후 인민군들이 우리동네에까지 들어와 이웃집 사랑방을 빌려 그들의 사무실로 사용하면서 전쟁을 수행하였다.

나는 어린 시절 좌우익 간의 전쟁을 두 번이나 겪은 셈이다. 삶과 죽음이 오가는 그 전쟁 속에서 어린아이였지만 그 참혹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 폭격이 있었던 날 잠자리에 들기 전 외할아버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정도령이 오시면 살기 좋은 세상이 된다고 했다. 그분이 언제 오실 지는 잘 모르겠다. 나도 정도령을 만나고 싶다만 나는 나이가 많아 그분을 못 만날 것 같다. 아마 손자 되는 너희 대(代)에나 혹 정도령을 만나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몹시 아쉬워하셨던 것이 기억 한구석에 남아 있다.

1991년 본부제단 헌당예배 때 찍은 감로이슬 사진(오양현 장로 촬영), 천도복숭아 모양으로 촬영된 것은 소사가 복숭아의 고장이며 무릉도원에는 복숭아가 있다는 것과 맥락이 닿아있다

나는 장남으로서 남동생이 2명, 여동생 1명이 있다. 동생들 셋 다 순천 M중고를 졸업했는데 그 학교는 기독교 계통이므로 동생들은 자연히 교회를 다니게 되었고 어머니도 동생들의 전도를 받고 순천 B교회를 다니셨다. 온 집안 식구들이 교회를 다니다보니 나를 교회로 인도하려고 하였다. 어머니는 내 명의로 교회에 계속 헌금을 했다고까지 말씀하면서 교회 가기를 권하셨다. 하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교회 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았고, 외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신 정도령이 오신다는데 그분을 만나려면 교회에 갈 수가 있나 하였던 것이다.

 

제대 후 계란장사를 시작하다

그런데 계란 장사를 하다 보면 파란(깨진 계란)이 많이 나온다. 그 파란을 먹기에는 너무 많고 그렇다고 남는 것을 그냥 버리기 아까워 개를 한 마리 키웠는데 파란을 개에게 자주 주니까 먹기는 잘 먹는데 그만 개가 이질병인 파보에 걸렸다. 개를 치료해 주려고 평소 알고 지내던 송 수의과 의원을 찾아갔다. 송 원장은 개에게 주사를 놔주고 약을 준 후 “어이, 동생! 정도령이 나왔다네. 이거 한번 읽어보소” 하면서 책과 전단지를 보여 주었다. 그 책의 제목은 한자로 정도령(正道令)이라고 쓰여 있었다. 전단지도 정도령에 관한 내용이었다. 송 원장도 관심은 있는 모양인데 바빠서 더 이상 알아볼 엄두는 내지 못한 모양이었다. 몹시나 반가웠지만 표현은 하지 않았다. 책을 보니 할아버지 말씀대로 ‘드디어 정도령이 오셨구나!’ 생각이 들면서 39년 전 10살 때 외할아버지가 말씀해 주신 그 정도령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뜨면서 기쁨이 올라왔다.*

오양현 / 순천제단 책임장로

1963년 8월 한더위에 논산훈련소에 입대 진해수송학교를 거쳐 부산 제3항만사에 배치되었다. 우리 부대는 1964년 월남파병 시 비둘기부대, 맹호부대, 청룡부대의 장비를 3부두에서 선적하는 일을 하였으며, 부산수영부두에서 사상 처음으로 한국군에 인계되는 미사일(SAM) 장비를 검수하는 일을 하는 등 나의 군대생활은 대한민국 역사 상 최초의 일, 즉 월남파병과 미사일 인수가 내 손을 거쳐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있는 생활이었다고 생각된다.
1966년 2월 군에서 제대한 후에는 마땅히 할 일도 없었고 금방 취직도 할 처지도 못 되어 뭘 할까 고민하던 중, 닭 200수만 기르면 농촌에 중농(中農) 정도의 수입이 된다는 말을 듣게 되어 닭 200수를 주문하여 길렀다. 내가 아는 선배 한 분도 초등학교 교편생활을 하다가 사표를 내고 닭을 길를 정도로 수입이 괜찮을 거라는 소문이 단시간에 널리 퍼져 나가서 너도나도 닭을 기르는 바람에 공급과잉으로 계란값이 폭락하여 판로가 막혀버렸다. 당시 큰 계란 1개 값이 칠팔 원, 작은 계란이 삼사 원이었는데 쌓인 계란을 소비하기 위해 서울로 거래하는 상인에게 팔았더니 가격을 쳐주지 않아 손해가 많았다. 그래서 이러다가는 다 말아먹겠다 싶어서 직접 판매하기 시작하였다. 당시는 식당이나 음식점이 별로 많지 않아 계란을 수요로 하는 곳이 적어서 몹시 고전하였다. 그렇게 해서 시작한 것이 현재까지도 하고 있는 필생사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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