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회, 거센 파도 앞 무력한 배에서 죽음을 떠올리다

작성자 : 최고관리자Date : 2015-12-15 16:38  |  Hit : 2,764  
 입문수기   세 번째회, 거센 파도 앞 무력한 배에서 죽음을 떠올리다  

태어난 모든 생명체는 필연코 ‘홀로서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태어난 모든 생명체는 필연코 ‘홀로서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언제나 부모님 품 안에서 보호받고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삶은 온실 속 화초처럼 쉬 시들어 죽고 마는 운명에 던져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일찍 홀로서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조건 속에 놓여 있었음을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부모님이 자식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으니 더더욱 혼자서 모든 것을 생각하고 판단하면서 길을 찾아간 인천 해사고등학교 진학의 결과도 순전히 그런 나의 운명의 선택이었다. 따뜻한 남쪽 해남에 살던 나에게는 인천 해사고등학교는 유난히 쌀쌀한 바닷바람 때문에 황량하기까지 하여 더욱 몸과 마음을 움츠러들게 하는 곳이었다.
군대생활 같이 만만치 않은 기숙사 생활
나는 특별히 장래에 뭐가 되겠다는 구체적인 생각도 없었다. 해남에서 산다고는 하지만 바닷가에 가본 것은 고작 외갓집 근처에 있는 좁고 작은 연안 바다가 전부다. 그런 내가 지원한 해사고등학교는 해상에서 그것도 선박에서 5대양 6대주를 오랫동안 누비는 직업 활동을 하기 위한 특수전문 인력을 배출하는 학교에 입학한 것이다. 한 번도 생각도 안 해본 진로로 택하게 된 배경은 가정환경 때문이지만 나로서도 의외였다. 
해사고등학교는 두 개의 학과가 있다. 나는 물 밑에서 생활하는 기관과보다는 푸른 하늘과 바다를 볼 수 있는 낭만의 항해과를 택했다. 3년제 고등학교 과정으로서는 우리가 첫 기수였으며, 정원은 200명이었다. 그 전에 1년제 직업교육과정만 4기를 배출하였다. 당시 부산에도 똑같은 조건의 학교가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나와 형편과 사정이 비슷한 동기들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학교에서 생활하는 일체의 비용이 국비로 지원되기 때문에 용돈 외에는 들어가는 돈이 없다. 정복과 정모도 주고, 구두도 주고, 작업복과 작업모도 주고 체육복도 다 지원된다. 보통 가정의 넉넉한 학생들은 가족을 떠나 이런 고생스런 특수 전문학교를 택할 리가 없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로 그 나름대로 철이 든 친구들이 들어왔다. 
입학을 하면 전원이 기숙사생활을 하게 되었다. 하루 일과는 꽉 짜여진 규정과 규율, 통제와 질서에 따라 보낸다. 새벽 6시에 기상해서 아침 구보를 하고, 7시면 식사를 해서 8시 정도에 기숙사에서 학교 교실로 열을 지어 등교를 한다. 오후 4시 정도에 하교해서 자유시간을 갖고, 저녁식사를 한 다음 7시부터 자율학습시간이다. 자율학습시간이 끝나면 9시에 청소 및 정리 정돈을 하고 점검을 받고 10시에 취침을 한다. 점검에 불합격하면 잠을 제 때 못 자고 심지어는 단체 기합도 받는다. 밤에는 돌아가면서 일일 불침번을 선다. 평일에는 기숙사에서만 생활해야 되지만, 토요일 12시부터는 외박과 외출이 허용된다. 
한창 자유분방하게 뛰어놀 나이에 영락없이 군대생활을 하였던 것이다. 자유가 없는 통제생활이다 보니 중도에 학교를 그만두고 떠난 친구가 약 20여명은 되었다. 그만큼 사춘기 학생으로서는 감내하기 어려운 조건과 환경에 놓여 있었다. 요즘 군 생활에 대한 TV프로가 인기리에 방영되니 가히 군 생활과 비슷한 해사고등학교의 과정은 독자들의 상상에 맡겨도 충분히 이해가 가리라 본다. 3학년을 마치는 동안 군대생활과 거의 똑같이 단체 기합도 받고, 몽둥이 찜질도 당하고, 철저한 통제와 규율 속에서 강인한 정신력과 체력을 양성해 제대로 특수사회에 잘 적응하도록 철저하게 생활하게끔 되었다. 
해사고등학교를 다녔던 과거를 떠올리면,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교훈의 말씀이 하나도 틀리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가족의 정을 끊으며 생활했던 점, 공동체 생활에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엄격히 통제받고, 하나의 단체를 위해 개인의 역할과 사고방식이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가, 나와 타인과 사회와의 철저한 시간엄수에 대한 교훈 등, 타인과 더불어 사는 사회 생활하는 데 필요한 협력과 적응성, 인내력, 전문지식과 소양을 갖추는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한솥밥을 먹고 동고동락을 했던 동기생들과의 우정과 사제 간의 정은 각별한 것이었다. 고생스럽기도 했지만, 일반 학생들처럼 돈 문제, 직장문제, 사춘기 방황 따위 느껴볼 여유도 없이 어느덧 세월이 흘러 3학년 2학기에 접어들었다. 하나 둘씩 정든 교정을 떠나 10월부터 친구들이 실습을 나가기 시작했다. 만나면 헤어진다는 이별의 아픔은 참으로 서글픈 것이다. 실습은 해외로 나가는 친구도 있었지만, 나는 국내선으로 한진해운 소속사가 있는 포항으로 첫 실습을 가게 되었다. 
11월달 겨울에 문턱에 들어설 때이다. 사회생활의 첫 선박은 매력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500톤가량 되는 소형 제철코일 운반선을 타게 된 것이다. 난생 처음 사회에 진출한 선박생활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국내 연안만 돌아다니는 배였지만, 배가 작아 겨울 험한 바다 생활은 한마디로 연단장소였다. 파도가 3~4M만 쳐도 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자고, 낮에는 몸의 균형도 제대로 가눌 수 없는 날이 허다했다. 3개월간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선박 실습은 인천 월미도의 기숙사생활에서 잠재되었던 인간의 죽음이 언제 닥쳐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초조감의 그림자가 조금씩 꿈틀거리기 시작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3개월간의 실습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회사에서는 고작 교통비로 약 4 만원 정도의 용돈만 줬다. 사회생활의 쓴맛을 톡톡히 보아서 그런지 고생만 하고 손해보고 돌아오는 것 같아 씁쓸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3개월간의 고생을 보상받기라도 하듯 나는 집에서 하는 일 없이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실컷 3~4개월을 놀았다. 노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몇 달 노니 빨리 돈 벌러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해외 송출선을 타고 외국으로 나가게 되었고, 외국 선사가 운영하는 선박이므로 외국까지 가서 기간이 만료된 사람과 교대를 해야 했다.
태산 만한 파도 앞에서는 커다란 배도 나뭇잎처럼 위태로웠다
그렇게 해남 촌놈이 드디어 난생 처음 비행기를 22시간이나 타고 지구 반대쪽에 있는 이태리로 날아간 것이다. 참 비행기 오래 타니 지겨웠다. 이태리 모 항구에 정박해 있는 배에 올라서니 그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배 길이가 250m, 폭이 35m, 하우스가 5층 정도의 철광석 운반선이었다. 이 배는 남미와 유럽을 다니는 정기선이었다. 비교적 대서양 기후는 거칠지는 않아서 해상의 날씨가 좋았지만, 겨울이 되면 어느 곳을 막론하고 험난한 바다가 연출된다. 그 어마어마한 규모의 배지만 망망대해의 거친 바다 앞에서는 낙엽과 같이 위태했다. 안전할 것만 같은 배가 자연의 거대한 힘 앞에 맥을 못 추는 것을 보고,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의 그림자가 살며시 드리워졌다. 
사람은 좋을 때는 좋은 것에만 집착해 다른 것을 잊고 살지만,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하는 그런 짧은 순간은 상당히 가슴속에 깊은 여운을 남기는 법이다. 수십 만 리 떨어진 외국에 대한 호기심과 좋은 구경거리는 일시적인 만족을 줄 뿐, 마음으로 느끼는 허전함과 인간사의 즐거움은 한국이나 외국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일찍이 느끼게 되었다. 하루라도 빨리 어머니의 고생을 덜어드리고 동생들 뒷바라지를 해야 된다는 책임감이 부담으로 작용해서인지 1년의 계약을 잘 마무리하고 더 많은 돈을 빨리 버는 데에만 생각이 꽂힌 것은 나도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속물이었기 때문이리라.*
                                                                                                         김주호 승사 / 본부제단
온세계 만방에 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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