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한돌

진달래가 좋은 사람들 장미꽃이 좋은 사람들
가을비를 닮은 사람들 하얀 눈을 닮은 사람들
눈앞엔 바람이 불고 마음 속엔 단풍이 들고
엇갈린 외로움 속에 하루해가 저물어 간다

공사장에 일을 끝내고 집으로 가는 사람들
구릿빛 그 얼굴에 노을빛이 아름다워
택시를 잡는 사람들 바쁘게 뛰는 사람들
엇갈린 풍경 속에 도시의 밤은 깊어만 간다

지난밤엔 가을비가 많이 내리고 바람도 심하게 불어 아침에 일어나 보니 거리 곳곳에 낙엽이 수북이 쌓였다. 하염없이 떨어지는 낙엽을 보면서 감수성이 예민한 시인이라면 굵은 눈물을 뚝뚝 흘렸을 것이다. 아파트 경비원 아저씨는 힘이 드신지 빗자루질 하다 한숨을 내쉰다.

올해도 사계의 바퀴는 여지없이 돌아 이제는 아침 저녁으로 찬바람에 사람들이 옷깃을 여민다. 가을이 다 가도록 무엇이 바빠서 단풍놀이 한번 가지 않느냐고 핀잔을 주는 어머니는 친구들과 가까운 송해 공원에 가셔서 국화도 구경하시고 팔공산에도 단풍놀이를 다녀오셨다. 나는 제단의 창문으로 보이는 구청 앞의 나이 많은 큰 은행나무 잎사귀들이 노랗게 물든 걸 바라보며 늦가을의 정취를 느끼며 사색에 잠긴다. 은행잎들이 올 한해도 무더운 여름 그늘을 만들고 도시의 공기를 맑히는 사명을 충실히 다하고 이제 아름다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작별을 고한다. 아스팔트나 보도블록이 아닌 흙바닥에서 마지막 안식을 취하면 좋으련만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여고시절 빨갛게 물든 단풍잎을 시집 사이에 고이 끼워 간직하던 누나들도 이제는 그 단풍잎처럼 곱게 얼굴이 물들었다. 단풍놀이 안 가냐고 주위에서는 야단이지만 아름답게 늙은 가족과 이웃의 얼굴들이 이름난 산들의 단풍보다 멋있다.

 

진짜 멋쟁이는?

며칠 전 여느 날 아침과 마찬가지로 우유를 배달하던 중 앞산 밑에서 추어탕집을 하는 고객인 아저씨에게 우유를 건네자 “아주 멋쟁인데!”라고 말씀하셨다. 갑작스런 칭찬에 난 어리둥절했지만 “아저씨가 더 멋쟁이셔요.”하고 대답했다. 실제로 그 집 아주머니, 아저씨는 훤칠한 키에 조용하면서도 미소를 띤 모습에서 중후한 멋을 풍기시는 분들이다. 나의 어떤 모습을 보시고 과묵한 아저씨께서 멋있다고 하셨을까? 칭찬에 걸맞게 정말 멋진 마음을 지니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며칠 전 서울에 볼일이 있어 기차를 탔다. 수능이 끝난 주말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입석칸밖에는 자리가 없었다. 내가 탄 입석칸에 남학생 몇 명이 무리지어 올라타고 입장하더니 곧 이어 여학생 몇 명이 무리지어 또 입장했다. 보아하니 수능을 마치고 가까운 곳에 바람이라도 쐬려고 나온 수험생들이었다. 왁자지껄 떠드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나를 본 한 학생이 “아저씨 본다. 조용해라.”하니 저희들끼리 낄낄대고는 좀 조용해졌다. 내가 학력고사를 치른 날이 엊그제 같은데 꿈같이 세월이 흘러 30년이 뚝딱 지나갔다. 마음은 아직도 그들과 같은 연령대인데 그들이 나를 같은 대열에 끼워줄 것 같지 않다. 대충대충 살아온 내가 저들에게 인생의 멘토가 되지는 못하더라도 꼰대는 되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했다. 생기있고 발랄한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싱싱하고 풋풋한 과일향내가 난다. 20대도 나름대로 멋있는 세대이긴 하지만 진정한 멋은 적어도 30대 중반은 넘어야 몸에서 스믈스믈 나오기 시작한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바로 곁에는 70대쯤 보이는 할머니 두 분이 앉으셨는데 조용조용 한마디씩 대화를 나누고 계셨다. 성실하게 살아오신 어르신이 저 연세쯤 되면 멋있다기보다는 신성한 분위기를 풍기고 대화 한마디 한마디는 젊은 세대에게는 곱씹어 생각할만한 화두가 된다. 물론 세대와 상관없이 존경스러운 사람들이 세상엔 많다. 매일 쓰는 일기장 앞에서 부끄럽지 않으려고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산다는 국악소녀 송소희님, 내전으로 구호 활동가들도 많이 죽는 남수단에서 실향민들의 집과 삶의 재건을 돕는 유엔난민기구 청년직원 변유진님, 남수단 분쟁의 한복판에서 할머니처럼 자상한 미소를 잃지 않고 20여 년 난민을 치료해 온 의사 아타르님, 은퇴한 이후에도 지금 하는 호스피스 활동을 계속하겠다는 간호사 박명희님, 이런 분들 앞에서는 그저 고개를 숙이고 반성하게 된다.

 

자연을 닮는 우리들

잎사귀를 다 떨군 이팝나무와 은행나무 가로수들은 겨울채비를 슬슬 갖추고 올 겨울도 다시 새봄이 올 때까지 잘 견딜 것이다. 나도 50년 가까이 살아보니 사계의 흐름처럼 규칙적이진 않더라도 인생에서 고난의 시절은 계속해서 찾아든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예전에는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안달이 나서 빨리 해결하려고 애를 썼는데, 이제는 느긋하게 문제를 대하게 되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여유를 갖고 해결하려는 자세로 바뀌는 것 같다. 꼭 풀어야 할 매듭이 아니면 그냥 손을 놓아버리고 진짜 중요한 문제가 무엇인지 볼 줄 아는 눈을 조금은 가지게 된 것같다.

고통이 자연스럽게 삶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게 되면서 우리의 모습도 자연을 닮아간다. 계절의 변화에 순응하는 나무를 닮아간다. 한편으론 늘 푸른 소나무나 서리를 맞아도 청초한 국화, 부슬부슬 내리는 가을비, 차분히 내리고 소복이 쌓이는 흰 눈을 닮기도 한다. 나를 비롯한 서툰 멋쟁이들이 시골집 뒤뜰에 어머니가 담근 장독 속에 장이 맛들어 가듯, 뒤뜰 한쪽에 파묻어 놓은 독 속에 김장김치가 맛들어 가듯, 그렇게 시나브로 멋들어지는 겨울이 되면 좋겠다.*

라준경 / 대구승리제단 책임승사

온세계 만방에 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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