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회, 개구리! 우물 밖으로 뛰쳐나가다

작성자 : 최고관리자Date : 2015-12-15 16:39  |  Hit : 2,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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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회, 개구리! 우물 밖으로 뛰쳐나가다   

한 인간의 소소한 인생의 지나온 이야기를 왜 늘어놓을까. 나는 보잘것없고 내세울 것 없는 이야기를 통하여 인간의 심리구조가 어떻게 변하여 ‘미친 도전’이란 불로불사의 인생목표를 줄기차게 추구해 나아가는 데 대한 이해와 납득을 돕고자 하는 데 있다. 
가슴 속 정의감이 좀 있었던 듯
 중학교시절을 회상해 보자니 뭐 특별할 것은 없지만, 그래도 하나의 뚜렷한 기억이 떠오른다. 중학생이 갓 되어 여기저기서 모인 낮 모르는 친구들이 약 70명 모여 한 학급을 이루었을 때다. 개중에 어떤 친구가 있었다. 힘이 제법 세고 싸움깨나 잘 해보였다. 그 친구가 어떤 키가 작고 몸이 왜소한 학우를 갖고 노는 것이었다. 다른 친구들은 각자 자기 놀음에 빠져 있었지만, 불의한 그걸 지켜본 나는 가만히 있지 못했다. 다가가서 그러지 말라고 했다. 힘깨나 쓰는 그 친구가 네가 뭔데 참견이냐며 시비가 붙어 싸울 판이 되었다. 가까스로 학우들이 말려 싸움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상대가 쌈을 잘하든 힘이 세든 따지지 않고 내 가슴속서 끓어오르는 정의감에 따라 망설임 없이 행동했던 것이다. 
 이와는 좀 다르지만, 인성에 비슷하게 영향을 미치는 일이 또 있다. 바로 아래에 남동생이 있었는데 약간 성질이 모났다. 어느 날 동네 후배이면서 동생보다는 선배였는데, 동생이 그 후배를 약간 골탕을 먹였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 후배가 동생을 때려 주는 일이 있었다. 동생이 그 일로 형한테 후배를 혼내주라고 고자질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동생의 일이라고 해서 무조건 감싸고도는 것이 아니고 후배의 전후 사정 이야기를 듣고 오히려 동생의 잘못을 탓하였다. 비록 중학생의 어린 나이였지만 가족이라는 입장을 뛰어넘어 동생을 나무랬다. 
아마 이런 정의감이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불러주시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백수건달과 유흥의 고장, 해남
 아이들은 부모의 등을 보며 자란다는 일본 속담이 있다. 당시 감수성이 예민한 내 눈에 비치는 아버지는 자기 인생의 유희에만 집착하는 것 같았고, 어머니는 자기의 삶이라곤 거의 없는 희생으로 점철된 삶으로만 비추어 어린 마음에도 안돼 보였다. 나는 아버지를 통해서는 성인이 되더라도 아버지처럼 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고, 어머니를 통해서는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꼭 호강시켜 드려야겠다고 다짐을 하였다. 또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장남인 내가 책임지고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정신적으로 어렵고 힘든 사춘기이었지만 가출이나 탈선을 할 수 없었던 중요한 요인이 아닌가 싶다.
 사람의 천성은 유전적 요인과 후천적 요인인 환경에 의하여 크게 영향을 받는다고 흔히 말한다. 그것이 사람이다. 이러한 것으로 비춰 볼 때, 나는 아버지보다 어머니의 유전인자가 더 강하다고 내심 판단한다. 왜 그럴까? 청소년기 성격을 되돌아보면 내성적이고 마음이 여렸으며, 바른 마음과 타인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낄 줄 아는 그런 마음이 강했다. 그래서 사춘기 때 방황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내 고향 해남의 특성은 산업시설이라곤 거의 없다. 대부분 농어촌에 종사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었고 특히 농사와 장사에 의존해서 먹고 사는 고장이다. 그렇지만 해남읍은 시골 읍치고는 상당히 인구가 많고 지역이 컸다. 특히 술집과 음식점, 그리고 유흥시설이 다른 읍보다 많았다. 놀고, 먹고 즐기는 유흥시설이 유난히 발달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해남에는 백수건달이 많고 흥청망청 하는 일이 흔히 눈에 띠었다. 한창 민감하고 사회를 배워나가는 청소년들이 이러한 고장 특성의 영향을 받아 부랑아들이 많이 생겼다. 중학교 시절에는 상당히 많은 학생들이 불량 서클활동에서 왕성한 활동을 했다. 놀기 좋아하고 힘을 과시하려는 학생들이 군소집단을 이뤄 패거리가 되어 몰려다니며 활동하는 모임을 말한다. 아무리 힘센 애들도 그런 패거리에 잘못 걸리면 호도지게 얻어터진다. 등치가 작아 평상시 소외받던 애들이 가입하여 힘을 발휘하기도 하는 그런 모임이다. 읍내에서는 그런 패거리들끼리 패싸움하는 일도 잦았다. 중학생들뿐만 아니라 고등학생들과 젊은 청년들까지도 그랬다. 
 그렇지만 나는 천성적으로 그런 유의 성향과 거리가 멀었고 올바르게 세상을 살아야겠다는 마음의 중심을 가졌다. 어머니의 고생을 보고 마음의 중심을 잡게 돼
우리 집은 5일장이 열리는 시장 주변에 있었다. 면학분위기를 띠는 동네이기보다는 늘 장사하는 사람들과 물건을 구매하려는 사람으로 북적이는 그런 동네였다. 이런 동네에서 살았기 때문에 공부하고는 거리가 멀었고, 내 주변 친구나 형들도 열심히 공부하는 학구파들이 좀체 없었다. 내 인생의 올바른 진로에 대하여 진정으로 대화하고 조언해 주는 역할을 맡는 친구도 선배들도 없었으며, 부모도 그런 일과는 거리가 멀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 2학년이 되도록 열심이 놀았던 기억밖에 없는 것 같다. 지금도 그 시절을 생각하면 아쉽게 느끼는 것 중 하나다. 
 그래도 아버지의 무책임한 가장으로서의 역할과 고생스럽게 자식들을 뒷바라지하는 어머니를 생각해서도 나는 가출이라든가 한번쯤 저지를 만한 청소년 비행과는 거리가 먼 나름대로의 중심을 가지고 살았다. 어머니는 어린 자식들을 내동댕이치고 가출을 할 상황이 비일비재했으나 어린 자식들을 생각해서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던 것을 나는 지켜보아서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힘들고 고통 받는 사람들의 아픔을 느끼는 측은지심이 생겼다고 할 것이다. 방학이면 시골 농사짓는 큰집과 외갓집을 번갈아 가면서 농사일을 도우기도 하였다. 그때마다 큰집과 외갓집에서는 쌀과 농산물을 우리 집에 갖다 주어 어머니의 살림살이에 조금이나 보탬이 되는 것을 알아챘다. 물론 방학숙제하고는 거리가 멀 정도로 무관심했고, 개학해서는 허둥대고 숙제를 베끼기에 바빴다. 
 진학문제로 고민하다
어느덧 세월은 흘러 중학교 3학년이 되니 장래 진로에 대해 고민하며 조금씩 스스로 알아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물론 중학교 시절 성적은 중하이었으나, 중3이 되어서는 조금 공부에 신경을 써서 중간 정도의 성적은 거뒀다. 
 그 당시 공부에 대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영어 수학이 어느 정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학업시간에 꽤 집중해서 듣고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수업시간을 집중하다 보니 수학 푸는 것이 이해가 가는 것이었다. 그게 나는 제대로 기억이 된 줄로만 착각을 했던 것이다. 시험을 보면 충분히 풀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시험을 보면 전혀 공식이 떠오르지도 않고 찍기가 바빴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공부 방법이 틀렸었다. 수업시간에 배웠던 것을 예습 복습해야 하는 것을 모르고 나는 이해하는 것으로 다 된 줄 알았던 것이다. 항상 수학은 찍었고, 못 쓰는 답도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영어는 70점 정도는 받아서 낙제 점수는 아니었다. 머리는 그런대로 괜찮은 것 같다. 
 중3하고도 2학기가 되니 앞으로의 진로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이런 일로 부모님과 상의해본 적은 없다. 더더욱 친구나 선배 그 누구도 내 진로에 대하여 상담해 주는 대상이 없었다. 순전히 자신이 여러모로 생각하고 고민하여 진로를 결정하여야만 했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최소한 고등학교는 나와야 사회 생활하는 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여겨져 어떻게든 고등학교를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담임선생님도 성격이 인자하고 온화한 분이셨기에 나의 진로에 대해 함께 알아봐 주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가정형편상 인문계나 상고 계통의 학교도 갈 수 없다는 판단 하에 나는 비록 해남과는 너무나 멀리 위치한 인천 해사고등학교을 지원하기에 이르렀다. 낯설고 황량하기까지 한 매서운 바닷바람이 몰아치는 인천시 중구 북성동에 있는 외항선원을 양성하는 인천 월미도 갑문 바로 옆에 있는 바다와 맞닿는 곳에 위치한 국립학교로서 모든 학비와 기숙사비 의복 일체도 국비로 다 지원되는 학교였기 때문에 나는 조금이라도 어머니의 수고를 덜어드리고 장래를 위해 천릿길 떨어진 해사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된 것이다. 중학교 수학여행 때 해남을 벗어난 이후 우물안 개구리가 밖으로 뛰쳐나가듯 정든 고향을 떠나 낯설은 생활로 접어 든 것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진로에 대하여 생각하면, 사람의 운명이란 어떠한 계기로 바뀌게 되는데 내 인생의 전환점이 바로 인천으로 고등학교 진로를 결정한 것이라 본다. 어떻게 보면 좁은 해남 바닥에서 머무를 인생이 좀 더 넓은 미지의 세계로의 첫 발을 내딛는 도전의 삶이 시작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때 쯤 어머니가 점쟁이 무당한테 자식의 장래에 대해 묻고서 저한테 한 말이 생각난다. 어머니는 제 사주에 불이 많아서 이 해남을 벗어나면 좋지 않다고 제 운수에 대해 알아봤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말에 개의치 않고 과감하게 더 넓은 세계로의 모험을 과감하게 단행했던 것이다. 중3의 사춘기 예민한 시절에 벌써 가족을 생각하고 스스로 장래의 진로를 고민하는 조숙한 면모를 지니게 되었다.*                                                                                                                 김주호 승사 / 본부제단
온세계 만방에 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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