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회, 더 많은 월급과 빠른 승진에만 눈 먼 삶

작성자 : 최고관리자Date : 2015-12-15 16:34  |  Hit : 2,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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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회, 더 많은 월급과 빠른 승진에만 눈 먼 삶  

20살 나이에 해외 송출선을 타고 외국을 돌아다녀보고 솔직히 느낀 점은 한국 사람은 역시 한국이 살기 좋다는 것이었다. 또 선박생활에서 깨달은 점은 사회 경험이 많지 않은 나이에 생각하고 판단하는 상당 부분들이 미숙하고, 보는 관점이 부분적인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직책이 높은 분들과 나이 많은 분들의 경험과 지혜가 더 온전하고 확실하므로 응당 사회 초년생은 배우려는 자세가 합당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첫 갑판원으로서의 월급은 그 당시 돈으로 25만원 정도였으며, 육상에서 일반 직장에 들어가는 수준이었다. 다만 선상 생활을 하다보니 고스란히 그 돈이 저축이 되어 목돈이 되었다. 갑판원으로서의 일은 수월하였다. 어느덧 세월이 훌쩍 흘러 1년 만에 집에 돌아왔으나, 고등학교 때부터 가족을 떠나 생활한 관계로 집으로 돌아와도 덤덤했다. 이것은 우리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일찍 각자의 생활 패턴에 따라 살아서 그럴 게다. 
 운좋게  3등항해사 자격증을 따다
 대다수 인간은 자기중심적 삶에 빠져있는 게 공통된 현상이다. 나 또한 내가 꿈꾸는 세계에 빠져 있었다. 1년 선박생활을 하다 보니 이래 가지고 언제나 돈을 많이 벌 수 있나, 언제 더 높은 직책에 오르겠나 싶었다. 조급한 마음과 출세욕이 강하게 압박했다. 학교로 올라가서 나름대로 정보를 알아보았다. 그랬더니 5급 항해사 자격증만 있으면 항해사로서 승선이 가능하다는 얘기를 들었고, 동기 중에도 그런 친구가 있다는 것이었다. 해사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5급 자격시험에 합격했으나, 그 사실은 까맣게 잊었다. 
 항해사로 나가고자 목표를 세우고 나는 5급 자격증을 따기 위해 다시 운항과 서적을 구입해서 서둘러 공부를 했다. 그리하여 목포 해양대학에서 시험을 봐서 합격을 한 다음 부산에 있는 세진상운이라는 해외 송출선 회사에 문을 두드렸다. 운 좋게도 3등 항해사로 나가게 되는 기회가 온 것이다. 보통 3항사 자격은 부산 해양대학이나 목포해양대학을 나와야만 진출이 가능했다. 그러나 당시 해외 송출선은 외국만 다니므로 이들 대학 출신들이 기피하였다. 그러다 보니 보직이 생긴 것이다. 갑판원 1년 만에 3등 항해사로 진급한 것은 드문 일이다. 해사고등학교를 나온 데다, 시기가 맞아 떨어져 21살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운 좋게 그리 된 것이다. 일약 서열 제일 말단이 상위 서열에 들어 선 것이다. 그 당시 돈으로 70만원 받고 나가게 되었으니 꽤 큰 금액이다. 아버지도 고작 60~70만원 받을 때이다. 육상 회사에서는 대리나 과장급 월급 액수이다. 나의 이런 행보는 누가 조언해 주거나 길을 가르쳐 준 사람이 없이 순전히 자신의 생각과 판단으로 얻어진 쾌거였으니, 꽤나 순발력 있게 출세라면 출셋길을 달린 것이다. 
88올림픽으로 온 나라가 축제 분위기였는지 모르지만 나에겐 오직 빠른 성공만 정신이 팔렸다. 부풀은 가슴으로 부산에서 일본으로 비행기를 타고 일본 항에 정박해 있는 배에 승선하게 되었다. 첫 대면하는 선박의 길이는 150m, 폭 25m, 무게가 1만 5천 톤으로 약 30여명의 승선 인원으로 바다에서 항해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선박이었다. 흔히 생각하기를 배가 크면 안정적일 것 같지만 거기에도 배가 두 동강 날 위험이 있고, 작아도 항해 할 때 높은 파도에 요동이 심해져 불안과 침몰 위험성이 따른다. 그렇게 잔뜩 기대를 가지고 일본과 북미를 정기적으로 다니며 원목을 실어 나르는 일본 선주의 배를 탔다. 
분에 넘치는 직책이 되레 가시방석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막상 3항사로서의 시작은 큰 부담과 자격지심으로 시달리는 고난의 나날이었다. 3항사로의 자격으로 승선했지만 망망대해 속에서 30여 명의 생명과 수백 억의 재산을 지킬 만한 자격이 갖춰지지 않는 게 문제였다. 기본적으로 이론으로만 어느 정도 알았지 실무적인 전문 항해지식은 미숙하므로 하나에서 열까지 싹 새로 습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런 초년생 항해사를 맞아들인 선장님의 입장에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선장님이 직접 가르치기도 하고, 선임 항해사가 가르치기도 했다. 자기가 맡은 중요한 3항사 당직을 충분히 감당하여야 마땅할 터인데 전혀 그렇게 못하니, 아마도 회사를 욕했을 것이고, 나를 보면 신경질이 날 만도 했을 노릇이다. 나야 그저 빨리 돈을 많이 벌고자만 했지 현장에서 벌어질 일들에 대해 요모조모 따져보고 준비를 하지 못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회사에서도 그런 일 처리는 잘못 되었다고 보아야 하지만 그 원망과 질책은 고스란히 내가 받아야할 처지에 놓인 것이다. 
 처음 한두 달은 그야말로 가슴 졸이며 실무를 배워 나가야만 했다. 이런 경험은 당해 본 사람이 아니면 잘 모른다. 분에 넘치는 위치에 올라 책임과 역할을 제대로 못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가시방석에 앉은 느낌 그 자체이다.  한 2개월 정도 지나니 그래도 그럭저럭 역할을 소화해 냈다. 어느 정도 안정된 순간이 오다보니 직분에 맞게 선장님 이하 항해사 선배님들과 기관사 선배님들과 어울려 카드놀이도 하였다. 보통 나이가 40대 중반에서 50대 60대 되신 어른 분들이었다. 21살짜리가 그런 어른들과 어울리니 많이 컸다고 해야 할까! 어느 정도 실무가 파악되니 타성에 젖어 노력하지 않고, 카드놀이나 마작놀이나 어울려 하니 선장님이 볼 때 곱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내게 부전자전이라는 말대로 ‘그 아버지에 그 자식이었을까’ 놀기를 좋아했던 것이다.
 갑자기 선장님이 다짜고짜 싸대기를 후려쳤다 사실 우리가 다니는 항로는 일본 열도 곳곳 항과 북미이기 때문에 북태평양을 주로 다닌다. 항해 기간은 무려 15일 정도 걸린다. 육상에 머무는 날은 고작 3~4일이다. 15일 동안 바다 한복판에 둥둥 떠다니는 것이다. 당직 시간에는 조타수와 나뿐이다. 오전과 오후 8시에서 12까지 선다. 자동항법을 하기 때문에 자동으로 놓고 우리는 여러 잡담을 하며 무료한 시간을 보낸다.  어쩌다 지나다니는 배를 멀리 볼 수 있다. 북태평양의 날씨는 5대양에서도 날씨가 험하기로 유명한 곳이다. 한 4~5개월은 비교적 날씨가 좋으나, 7~8개월은 정말 날씨가 험하다. 얼마나 험하냐 하면 태풍과 같은 저기압이 수시로 올라와 산더미 만한 파도가 넘실대고 바람이 초속 60m까지 불어댄다. 보통 선박이 1시간에 25km 간다면 하루 종일 가도 제자리에 머무른 경우도 있다. 마파람이 불어서 그냥 방향만 잡고 있는 격이다. 배가 기울면 와! 이대로 넘어가는 것 아니냐 하는 불안과 공포감으로 머리카락이 쭈뼛쭈뼛할 정도다. 이 망망대해에 침몰해서 허우적거리다 소리도 없이 사라지는 것은 아닌지. 밤에 잠자리에서는 몸이 이리 넘어지고 저리 넘어지며 잠을 제대로 못 잔다. 그런 날이 많은 북태평양 항로다. 
어느 날 비가 몰아치고 바람이 거세게 부는 험난한 해상 악천후 속에서 선장님이 내 당직 시간에 올라왔다. 보통 날씨가 심하게 좋지 않으면 으레 선장님이 올라와서 항해사를 지도하기도 하지만, 나는 좀 사정이 달랐다. 여러모로 부족한 풋내기 3항사가 평상시 열심히 하지 않는 것도 고깝게 생각하는데 어른들 노는 데 끼어서 같이 노니까 못마땅하고 괘씸했을 것이다. 항해실에 올라와서 나를 부르더니 다짜고짜 귀싸대기를 후려쳤다. 한 대 맞으니 뺨이 얼얼하기는 두 번째치고 마음이 서글펐다. 기분이 나빴다. 항해실 문을 열고 옆 관망대로 비를 맞으며, 뱃머리를 봤다. 분이 안 풀렸다. 다시 항해실로 들어가서 실내로 통하는 문을 열고 ‘쾅’ 닫으며 방으로 내려갔다. 순간 자살하고픈 충동이 불일 듯 일었다. 밖으로 나가 배가 심하게 흔들거리고 파도가 무섭게 넘실대는 바다를 보니 무섭고 두려웠다. 선뜻 자살할 마음이 사라져 다시 항해실로 들어가 선장님을 피해 한쪽에서 앞 쪽을 주시하고 눈물을 글썽이며 말없이 섰다. 그렇게 그 날이 갔다. 
내가 이렇게 사실적으로 그날을 묘사한 이유가 있다. 사람이 자격을 갖추지 않고 높은 자리에 올라간다는 것은 그만큼 힘들고 고통스럽다는 것을 술회하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어린 나이에 인격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점도 있었다. 하지만 냉엄한 사회라는 현실 속에서 직책과 급여에 맞는 자질과 전문성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면 전문인으로서 대우를 못 받는다는 것이다. 또한 타인과 회사에 크나큰 피해를 준다는 점을 생각해서 반드시 한 자리 할 때는 그만한 책임감과 의무감이 따른다는 중요성을 생각해보고자 한 데 있다. 
 원치 않는 귀국
북태평양 험난한 해역을 항해하는 위험이 따르긴 했지만, 원목을 운반하는 선박이니 여러 명목으로 용돈이 많이 생겼다. 한 달이면 십만 원정도 생겼으니 돈 버는 데는 좋은 조건이었다. 그렇지만 어디 인생이 돈이 전부인가 3항사로서 핸디캡이 있다 보니 마음 한 구석에는 어서 빨리 귀국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런데 인생이란 것이 묘해서 한쪽 맘은 한시라도 하선하고 싶은데 군 병역 문제가 엮여 있어 불가피 1년 연장 신청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관계가 서운한 전임 선장님은 기간이 만료되어 중도에 귀국하였다. 후임 선장님은 나와 서로 사이가 좋았다. 물론 어느 정도 구실을 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전임 선장님이 나의 그런 무능함과 불성실한 태도를 회사에 알려서 내가 승선 중에 신청한 연장 신청이 안 받아지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전적으로 그런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승선하고 있는 선박은 험난한 해역을 항해하는 곳이긴 했으나 워낙 부수입이 많이 생겨서 서로 승선하려는 부분도 있었을 것이다. 내 앞에 어떤 운명이 도사리고 있기에 원치 않는 귀국을 불가피 하게 된 것일까?*                                                                                                                  김주호 승사 / 본부제단
온세계 만방에 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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